우리말에는 뜻을 알고 나면 그 말을 지은 사람의 눈길까지 함께 그려지는 낱말이 많다. 한자어나 외래어에 밀려 자주 쓰이지 않을 뿐, 사전 속에 조용히 살아 있는 고운 말들을 몇 개 꺼내 본다.
비와 바람에도 이름이 있다
같은 비라도 옛사람들은 굵기와 세기에 따라 다르게 불렀다.
- 는개: 안개비보다는 굵고 이슬비보다는 가는, 안개처럼 부옇게 내리는 비
- 여우비: 볕이 쨍하게 난 날 잠깐 지나가다 그치는 비
- 억수: 물을 퍼붓듯 세차게 쏟아지는 비 ("억수로 온다"의 그 억수다)
바람도 마찬가지다. 뱃사람들은 방위마다 이름을 붙였는데, 서쪽에서 부는 바람은 하늬바람, 남쪽에서 부는 바람은 마파람이라 했다. "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"이라는 속담이 바로 여기서 나왔다.
빛으로 지은 낱말
가장 아름다운 축에 드는 말은 윤슬이다. 햇빛이나 달빛을 받아 반짝이는 잔물결을 가리키는데, 강가나 바다에서 물이 은가루처럼 부서지는 그 장면이 딱 한 단어에 담겨 있다. 밤하늘로 눈을 옮기면 미리내가 있다. 은하수를 뜻하는 우리말로, '미르(용)'가 사는 '내(냇물)'라는 풀이가 전해진다. 참고로 미르는 용을 가리키던 옛말인데, 지금은 거의 쓰이지 않아 사라진 옛말 쪽에 더 가까워졌다.
무심코 쓰는 순우리말
멀리 있는 말만 예쁜 건 아니다. 시장에서 흔히 쓰는 에누리도 순우리말인데, 재밌게도 '값을 깎다'와 '값을 더 얹어 부르다'라는 정반대 뜻을 함께 지닌다. 가게가 그날 처음으로 물건을 파는 일은 마수걸이라 하고, 눈치채지 못할 만큼 조금씩 변해 가는 모습은 시나브로라 한다. "실력이 시나브로 늘었다"처럼 쓴다.
이렇게 뜯어보면 우리가 쓰는 말 상당수가 순우리말과 한자어가 얽혀 있고, 낱말 하나하나에 저마다의 유래가 숨어 있다. 뜻을 알고 쓰면 같은 문장도 조금 더 깊어진다.